와인 맛과 향, 블렌드 비율’이 좌우

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얼마 전 와인모임 멤버 중 한 분이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우연히 고향 후배가 가져온 와인을 한 잔 마셨는데, 그 향과 맛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 ‘밤마다 꿈 속에 나타난다’는 설명과 함께 그 와인을 꼭 구입해보라고 간청한다. 물론 ‘좋은 가격’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50대 후반으로, 와인 초보 수준을 막 벗어난 그는 녹차 재배와 관련 유통업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평소 와인모임 때 품질보다는 가격에 집착해 썩 마땅치 않았던 그룹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년간 음료사업에 매달려서 그런지, 향에 대한 감각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런 그가 한 모금 마셔보고 푹 빠진 와인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의 어렴풋한 기억을 조합해보니 ‘죠셉 펠프스, 이니스프리 까베르네 소비뇽’이 분명했다. ‘짙은 보랏빛’이나 ‘잘 익은 체리 향’ 이라는 단어에서 나름 확신을 가졌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주문은 냈고, ‘와인을 잘 받았다’는 활기찬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며칠이 지난 후 이번엔 ‘그때 그 향과 맛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 다른 종류의 와인이라는 것. 불만을 토로했지만 웬만하면 그냥 마실 것을 권했다. 수준 높은 와인 전문가도 아니고, 반납과 재주문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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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품종 섞는 블렌딩 기술
수긍하는 듯 보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또 다시 연락이 왔다. ‘도저히 그 향을 잊을 수 없다’며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구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고민 끝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집중해서 들어 보니 문제의 그 와인은 같은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인시그니아’ 였다. 더 큰 문제는 가격이었다. 죠셉 펠프스, 인시그니아는 한 병에 50만 원대(이하 소비자가)에 달하는 고가 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니스프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8만 원 안팎이다.

단 한 번의 경험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거금을 지불하고 ‘행복’을 찾았다. 와인 가격이 천차만별인 점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와인이 있고, 그 중 한 종류에 빠졌다면 생산자가 책정한 비용을 그대로 지불해야 그 맛과 향을 다시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이니스프리는 모두 반납했다. 판매 직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와인의 맛과 향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서로 다른 포도 품종을 섞는 블렌딩 기술 때문이다. 즉 품질을 개선하고 와이너리 고유의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도와 당도, 타닌감이 각기 다른 포도즙을 적절히 혼합해야 한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오크통을 구분하거나 유산발효를 차단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와인의 풍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균형감 있게 만들 수 있다. 블렌딩은 보르도 와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와인메이커의 경험과 능력이 증명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까베르네 쇼비뇽의 진한 과일향을 메를로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타닌감이 감싸주면 훨씬 더 고급스런 와인이 탄생하는 식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비율 90% VS 84%
그렇다고 블렌딩 비율과 관련한 공식적인 규정은 없다. 다만 어떤 포도 품종을 기본으로, 어느 정도 사용해야 레이블에 표기할 수 있는지는 나라와 지역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카베르네 쇼비뇽을 75% 이상 사용해야 레이블에 표기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명 와이너리의 블렌딩 비율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다. 정확한 양조법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고 가족들만 공유하면서 명성을 이어오는 곳도 많다. 날씨가 고르지 못한 유럽에서는 포도 작황에 따라 생산연도별 블렌딩 비율을 다르게 적용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두 종류 와인의 생산지는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다. 기본 포도 품종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하지만 블렌딩 기술에 따라 전혀 다른 맛과 향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 ‘이니스프리’ 블렌딩 비율은 카베르네 소비뇽 90%, 메를로 10%다. 이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짙은 루비 컬러와 적당한 타닌감이다. 와인 초보자라도 첫 모금에서 연유와 바닐라 향을 잡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크 향이 강해지면서 카카오, 제비꽃 향이 나타난다. 끝 무렵엔 타닌이 부드러워지면서 초콜릿 향과 감칠맛이 더한다. 반면 ‘인시그니아’는 같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기본으로 사용하지만 맛과 향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블렌딩 비율은 카베르네 소비뇽 84%다. 그 외에 프티 베르도 10%와 메를로 3%, 말벡 3%를 섞어 만들었다.

샴페인은 혼합비율로 품질 유지
이 와인은 ‘보르도보다 더 보르도 특성을 살린 와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실제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는 대부분 ‘프랑스 와인’으로 나온다. 보르도 와인이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와 완벽하게 정착한 케이스다. 첫 모금에서 숲 속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신선한 느낌과 붉은 과일, 다크 초콜릿, 커피 향을 잡을 수 있다. 산도와 당도의 밸런스 유지는 물론, 잔향이 오래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테이스팅 노트다.

2013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총 39개 빈티지를 시음했고, 평균 점수는 94점에 달했다. 특히 1991년과 1997년, 2002년 빈티지는 100점 만점을 받으며 미국 와인의 저력을 과시했다.

김준철 와인스쿨 김준철 원장(국내 최장수 와인인 마주앙을 개발한 장본인, 현재 일반인을 대상으로 와인교육스쿨을 운영)은 “이 세상 모든 와인의 품질은 블렌딩 비율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넌 빈티지(Non-Vintage, 여러 해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 제품이 대부분인 샴페인의 경우 주스 혼합기술을 통해 동일한 품질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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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와인칼럼니스트.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 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