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약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

  • 글 정재훈(약사)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사진 셔터스톡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 2017.09.08 09:00

    약문약답

    나한테 잘 듣는 약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줘서는 안 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긴 한데, 왜 안 된다는 걸까? 증상이 비슷해도 원인이 다를 수 있고, 원인이 같다 해도 사람에 따라 약의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사람마다 약효에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연령, 체중, 복용 중인 다른 약들, 만성질환 유무, 약물 알레르기 등의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각자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전자형에 따라 같은 약이라도 사람에 미치는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유전자형은 약효뿐만 아니라 약으로 인한 부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이 달라서 나타나는 다양한 약물 반응을 연구하는 학문을 약물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이라 한다. 어려운 전문용어처럼 들리지만, 알고 보면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제일 쉬운 예로 알코올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술을 기호식품으로 소비하고 있지만, 사실 술 속의 알코올(에탄올) 성분은 약물이다. 그런데 이 알코올이라는 약물이 우리 몸에 들어왔을 때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얼굴을 빨개지고 한 잔도 마실 수 없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얼굴은 빨개지는데 마시긴 마시고, 어떤 사람은 얼굴색 변화도 없이 잘 마신다. 어떤 유전자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알코올이라는 약물에 대한 효과와 부작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약

    유전자형에 따라 약효 달라져

    우리가 약을 복용했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유전자형에 따른 약효와 부작용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은 집에 물건이 쌓여도 청소를 잘 안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즉시즉시 청소해서 불필요한 것들은 내다버린다. 우리 몸도 이와 비슷한데, 유전적 특성상 어떤 사람들은 약물을 서서히 처리(대사)하여 몸 밖으로 내보낸다. 이에 따라 약물이 오랫동안 체내에 머물고, 축적되어 독성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반대로 유전적 특성상 체내 약을 들어오는 족족 재빨리 청소하여 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약물을 체외로 배출하는 속도가 빠른 사람에게 일반적인 용량으로 약을 투여했다가는 혈중 약물 농도가 낮게 나타나서 약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유전자 구성에 따른 약효의 차이 때문에 치명적 위험을 겪게 되는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50년대 수술에서 근육이완제로 사용된 ‘숙시닐콜린’이라는 약이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약은 아주 짧게 작용하여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술 뒤에 약의 투여를 중단하면 몇 분만 지나도 약효가 사라지고 환자는 다시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된다. 혈액 속에서 이 약 성분을 무력화시키는 슈도콜린에스트라제라는 효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물지만 1500명 가운데 한 명꼴로 유전적으로 이 효소를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치명적이다. 효소가 숙시닐콜린의 약효를 신속하게 제거하지 못하니 근육 이완이 지나치게 연장될 수 있으며 환자는 수술이 끝난 직후 평소대로 호흡할 수 없다. 그냥 두면 호흡곤란으로 환자가 사망할 수 있으므로, 약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장시간 산소호흡기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마다 약 청소 속도가 다르다

    유전적 요인으로 인한 약 부작용 차이는 생각보다 흔하다. 미국인(백인, 흑인)의 절반 정도는 특정 약물을 대사하는(쉽게 말해 몸에서 청소하여 내보내는) 간 효소인 N-아세틸전달효소가 서서히 작동한다. 이들을 가리켜 아세틸화가 느린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에 빠른 사람도 있다. 아시아인은 열에 아홉 꼴로 아세틸화가 빠른 편이다. 쉽게 말해 특정 약물이 몸속에 들어오면 미국의 백인, 흑인 가운데 절반은 천천히 청소해서 내보내지만 아시아인의 90%는 빨리 청소해서 내보낸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유전자형에 따른 약의 청소 속도가 달라서 문제가 되는 약은 여러 가지다. 아세틸 전달효소로 대사되는 이소니아지드(결핵 치료에 사용하는 항생제), 설폰아마이드계열 항생제, 하이드랄라진이라는 고혈압약이 대표적이다.

    유전적으로 약의 청소가 빠른 그룹과 느린 그룹의 차이는 크다. 앞서 언급한 결핵치료제 이소니아지드의 경우, 혈중 농도 차이가 무려 4배에서 6배까지 난다. 아세틸화가 느린 사람의 경우 효소가 약물을 신속하게 대사하는 환자(아세틸화가 빠른 사람)에 비해 혈중 약물 농도가 증가하고 우리 몸속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간독성과 같은 부작용 위험이 증가한다.

    약효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부작용 위험이 커지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유전자형 때문에 약효가 제대로 안 나타나는 것도 큰 문제다. 코데인이라는 진통제는 간에서 특정한 효소(CYP2D6)의 도움을 받아야 모르핀으로 변하여 진통 효과가 나타나는데, 유전자에 따라 이 효소의 작동에 차이가 있다. 이 효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코데인이 진통제 성분으로 변신하기 어렵다. 똑같은 약을 먹어도 진통 효과가 없을 수 있는 이유다. 반대로 우울증치료제, 조현병치료제, 일부 부정맥치료제의 경우에는 같은 효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약이 체내에 쌓이고 이로 인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약물과 유전자 관계 연구 활발

    최근에는 약물 대사와 관련된 개인별 유전자 구성을 분석하여 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암, 유전질환 같은 난치병일수록 어떤 약을 써서 치료하느냐를 결정하는 데 유전자가 중요하다. 고가의 항암제가 특정 유전자 변형이 있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다면 유전자형을 검사해 미리 유전자 변형 유무를 아는 것이 치료 비용의 절감 차원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약을 투여하던 시대에서 ‘개인화 의료(personalize medicine)’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약의 효과 또는 부작용이 유전자형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유전자형의 차이로 인해 약효가 적게 나타나거나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전부 분석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나의 유전적 특성에 딱 맞는 약을 딱 맞는 용량으로 선택해서 사용하기가 더 쉬워질 것임은 분명하다. 물론 그때가 되어도 다른 사람의 약은 쓰지 말아야한다.

    정재훈

    정재훈 과학·역사·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홍보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 Copyright HEALTHCHOSUN.COM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