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고소공포증… '아바타'와 대화하며 고친다

15년째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김모(42·경기 수원시)씨 앞에 술판이 벌어졌다. 옆자리에서는 삼겹살을 굽고 있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김씨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흘러내릴 듯 가득 채운 술잔을 김씨한테 건네며 미소를 짓는다. 김씨는 '술잔을 받을까 말까' 10분 이상 고민했지만 결국 유혹을 뿌리치고 마시지 않았다.

이 상황이 벌어진 곳은 술집이 아닌 병원이다. 김씨는 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 가상현실클리닉에서 알코올 중독자에게 실시하는 가상현실 '음주 거절 훈련' 치료를 받는 중이다. 이 술자리는 모두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다. 김씨에게 술잔을 건넨 이는 가상현실 속 '아바타'다. 이처럼 컴퓨터 속 가상현실 상황에 환자를 집어넣어 병을 치료하는 '가상현실 치료'가 도입·확산되고 있다.

◆환자가 겁내는 가상 상황에서 아바타와 대화하며 치료

가상현실 치료는 정신과의 대표적 치료법 중 하나인 인지행동치료(환자가 곤란해 하는 상황을 펼쳐 놓고 적응하게 하는 치료법)의 '사이버 버전'이다. 상황극이나 의사와의 대화 등의 형식으로 이뤄지는 일반적 인지행동치료보다 훨씬 다양한 상황을 컴퓨터로 만들어 치료에 응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환자가 머리에 특수한 헬멧을 착용하면 환자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 3차원 입체 화면으로 눈앞에 뜬다. 환자는 자신이 가상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헬멧에 부착된 마이크를 통해 아바타와 대화하게 된다. 환자의 말에 따라 미리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돼 있는 다양한 응답이 헤드폰을 통해 들린다. 의료진은 환자가 가상현실 속에 있는 동안 환자의 몸에 연결된 센서를 통해 1000분의 1초 단위로 기록되는 환자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하면서 어떤 가상현실을 이어나갈지 결정한다. 의사가 환자와 아바타의 가상 상황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고소공포증 환자, 가상현실 치료 뒤 75층 옥상까지 거뜬

가상현실 치료는 미국·스위스 등지에서 10년쯤 전 시작됐다. 처음에는 고소공포증·광장공포증·사회공포증 등의 치료에 적용하다가 정신분열병을 거쳐 최근에는 알코올 중독자의 단주(斷酒) 훈련에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는 5년 전 들어와 중앙대용산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 네오마인드의원 메타인지행동치료연구소 등에서 시행하고 있다.

한덕현 중앙대용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공포증 치료는 각자 두려워하는 상황을 가상현실로 구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고소공포증 환자는 높은 투명 엘리베이터 안에 있도록 하고, 사회공포증 환자는 아바타가 가득한 강의실에서 발표하게 만드는 것 등이다. 정신분열병 치료는 가족, 친구, 직장 등 환자가 혼란을 많이 느끼는 상황을 구현해 그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유도한다. 김재진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는 "보통 매주 두 번씩 5주일간 총 10회 진행하며 한 번에 1시간30분 정도 실시한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치료의 효과를 증명하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미국 에모리대학병원에서 20명의 고소공포증 환자를 대상으로 7주간 높은 곳에 올라가서 버티는 가상현실 치료를 실시한 결과 치료가 끝난 뒤 모든 환자가 실제로 75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한덕현 교수팀이 지난해 가상현실 치료를 받은 알코올 중독 환자와 기존의 인지행동치료를 받은 환자 18명을 비교한 결과 가상현실 환자의 뇌 전두엽에서 나오는 알파파 증가 폭이 컸다. 전두엽에서 알파파가 많이 나오면 술을 덜 찾게 된다.

◆해마를 자극하는 가상현실로 치매 예방

국내 의료진은 최근 세계 최초로 가상현실 치료를 치매 예방에 적용했다. 경기도 성남시 노인보건센터는 지난 1월부터 가상현실을 이용해 치매의 전(前) 단계인 경도인지장애를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대형 스크린에 '보물찾기 미로'가 나타나고 환자는 미로를 헤매면서 보물을 찾는다. 미로마다 입구의 문 모양이 독특하거나 물건의 배치가 달라 환자가 이를 기억하고 길 찾기에 활용하도록 유도한다. 프로그램을 개발한 차경렬 문경제일병원 정신과 전문의는 "치매의 전 단계에서 치매로 발전할 때 가장 먼저 공격받는 뇌의 부위가 해마"라며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가상현실로 해마를 계속 자극해 해마의 손상을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제일병원과 성남시 노인보건센터는 이 프로그램을 1년간 시험 실시한 뒤 치매 예방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분석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