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유명한 씨름 선수인 P장사가 백두장사 시합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감독과 함께 찾아왔다. 지금이야 ‘K1’이다, ‘프라이드’다 해서 각종 격투기가 유행하는 통에 우리 민족의 고유한 스포츠인 씨름이 유명무실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설날 같은 명절 때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모래판을 뒤흔드는 천하장사와 아슬아슬한 씨름 경기를 보는 것은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산 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치질 증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몹시 부끄러워하는 P장사 대신, 함께 온 감독이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동안 한번도 천하장사에 오르지 못해서 이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열심히 훈련을 했는데, 항문 통증 때문에 더 이상 훈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씨름이 어떤 운동인가. 온통 힘을 써야 하는 운동이 아닌가. 멀쩡한 사람도 그렇게 힘을 쓰면 없던 치질이 생길 판인데, 치질이 있는 경우 운동을 계속한다면 악화될 것이 너무도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씨름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P장사를 진찰해 보니 단순한 치질이 아니었다. 힘을 많이 쓰는 직업에다 체중까지 많이 나가는 때문인지, 치루와 치열, 치핵이 모두 있는, 그야말로 ‘치질 백화점’이었다. 일종의 혼합 치핵으로 내치핵와 외치핵 등이 복합적으로 발병한 상태였던 것.
상담 끝에 P장사는 결국 수술을 했다. 다행히 워낙 건강체인 데다 수술도 잘 되어 3일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퇴원 수속을 앞두고 감독이 다시 찾아왔다. 감독은 재발을 우려하고 있었다. “지금 퇴원하면 저 친구 성격에 금세 훈련에 들어갈 것이고 힘을 쓰다 보면 치질이 재발하거나 악화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아예 푹 쉬면서 이번 기회에 완전히 뿌리 뽑으라고 좀 해주십시오.”
선수를 아끼는 감독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지만, P장사와 같은 혼합 치핵도 수술로 근본치료를 하면 재발하지 않기에 “시합을 앞두고 있기에 최소절제근본치핵수술과 치루절제수술, 치열수술을 해서 힘을 쓰는 데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라며 그를 씨름판으로 돌려보냈다.
P장사와 감독은 반신반의하며 퇴원했다. 그리고 한달 후 시합날, 병원 직원들 모두가 P장사를 응원하는 가운데 결승전이 벌어졌다. 접전 끝에 그는 드디어 백두장사에 올랐다. P장사는 텔레비전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 동안 저를 괴롭히던 치질을 수술 받고 항문이 상쾌해서 이겼다”며 한바탕 람바다 춤을 추었다.
흔히들 치질은 수술을 해도 재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P장사의 경우처럼 수술로 뿌리를 뽑아버리면 다시 생기지 않는다. 재발이라 생각하는 것은 수술 부위가 아니라 다른 곳에 다시 치질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치질 수술 후에는 정기적인 통원 치료 및 상담과 생활습관 개선을 통해 새로운 치질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소 잃고 고친 외양간이라도 지속적인 유지보수는 필요한 법이다.
/이동근 한솔병원 대장항문외과 대표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