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정표]

누구나 마음의 병을 겪을 수 있지만 쉽게 털어놓기 힘들고 때론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는다. 헬스조선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강준 교수의 칼럼을 연재해 ‘읽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의학’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정신건강 문제를 풀어내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편집자주)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가며 미루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보자./사진=클립아트코리아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가며 미루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보자./사진=클립아트코리아
“오늘은 꼭 해야지.”

아침에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오랫동안 답하지 못한 메일에 답하고, 저녁에는 영어회화와 운동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책상부터 정리하고 싶어진다. 잠깐 휴대폰을 본다는 것이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결국 밤이 되면 스스로에게 익숙한 약속을 한다.

“내일부터는 정말 시작해야지.”

누구에게나 미뤄둔 일이 있다. 운동이나 공부처럼 조금 귀찮고 매일 해야 하는 일도 있고 필요한 회의나 중요한 결정, 그리고 누군가에게 해야 할 사과처럼 미룰수록 마음이 부담스러워지는 일도 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미루면 결국 내가 힘들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꾸 미루는 것일까?

흔히 미루는 사람을 게으르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미루는 행동의 이면에는 그 일을 마주할 때 생기는 불편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생긴다.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하기 싫은 막연한 저항감 등이 그것이다. 그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하지 뭐.”

순간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줄지 않았는데 부담은 잠시 사라진다. 바로 이것이 미루기가 반복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불편한 일을 피했더니 불안과 긴장이 줄어드는 경험이 일종의 즉각적인 보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뇌는 다시 그 편한 길을 선택하고 싶어진다.

완벽주의도 미루기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완벽주의자는 모든 일을 부지런히 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준이 너무 높으면 시작하기가 어려워진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제대로 해야지’, ‘이왕 하는 거 완벽하게 해야지’, ‘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아’. 이런 생각은 얼핏 책임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부족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이 숨어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으니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잘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기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덜 아프다.

또 하나는 ‘해야 한다’는 마음에 대한 저항이다. 재미있게 하던 일도 의무가 되는 순간 갑자기 하기 싫어진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누군가 시킬 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늘 반드시 끝내야 해’, ‘이건 꼭 해야 해’라고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일은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해야 할 일은 어느새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나를 압박하는 일이 된다. 그러면 마음 한편에서는 슬그머니 반발심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은 뇌의 작동과도 관련이 있다. 어렵거나 부담스러운 일을 마주하면 편도체를 비롯한 위협이나 불편한 정서 반응에 관여하는 여러 뇌 영역이 관여한다. 반면, 전전두엽은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당장의 충동을 조절하고 미래의 목표를 위해 행동하도록 돕는다. 실제로 뇌영상 연구에서도 자기통제와 감정조절에 관여하는 전전두엽을 비롯한 여러 뇌 영역과 미루는 행동의 연관성이 보고됐다. 결국 미루기는 어느 한 뇌 부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조절과 자기통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관여하는 여러 뇌 기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의 뇌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우리는 미래의 큰 보상보다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작은 보상에 쉽게 이끌린다. 1년 뒤 원고를 완성했을 때 느낄 성취감은 정말 크겠지만 너무 멀리 있다. 반면, 재미있는 유튜브 영상을 보는 즐거움은 작아도 지금 바로 얻을 수 있다. 운동을 해서 몇 달 뒤 건강해지는 것보다 소파에 누워 쉬는 편안함은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큰일을 미루는 것이 순간적으로 꽤 합리적인 선택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불편함은 줄어들고 당장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보상의 대가를 미래의 내가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착각을 한다. 특별한 근거도 없이 미래의 나를 믿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피곤하고 바쁘지만 왠지 내일의 나는 시간이 많을 것 같다. 오늘은 집중이 안 되지만 다음 주의 나는 더 부지런하고 컨디션도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오늘 하기 싫은 일을 내일의 나에게 넘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내일이 되면 그 사람 역시 오늘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야단치고 낙인찍기 전에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하기 싫은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실패할 것 같아서 두려운 것인지, 너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앞이 안 보여 막막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원인에 따라 해결 방법도 달라진다.

목표를 낮추는 것도 도움이 된다. 보고서를 완성하려 하지 말고 일단 첫 단락을 쓰는 것부터 시작한다. 한 시간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기보다 일단 10분만 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작의 문턱이 낮아지면 마음이 느끼는 저항도 작아진다. 잘하는 것보다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조금 부족한 상태로 시작하고 하면서 고쳐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가 미루는 것은 단순히 일이 아닐 수 있다. 그 일을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될 두려움과 부담감, 부족한 자신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실망감을 함께 미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룬다고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당신은 미룰 수 있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모든 것을 끝낼 필요도, 완벽하게 처리할 필요도 없다. 한번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시작해보자.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일단 시작해보는 용기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오늘 조금밖에 하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시작했고 앞으로 나아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루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지금 시작하는 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