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자고도 못 일어나겠는데… 걱정 잊으려는 회피 행동일까

[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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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술, 게임 등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면 걱정으로부터 도피하는 중일 수 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우울증 환자는 괴로운 현실을 피하려 잠으로 숨어든다. 밤새 잤는데도 아침이면 알람을 끄고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걱정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게임과 짧은 동영상에 빠져 몇 시간을 흘려보낸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음식을 계속 먹는다. 휴대전화에는 읽지 않은 문자와 이메일이 쌓이고, 약속을 취소하고 가족이 말을 걸어도 대화를 피한다. 이런 모습은 우울증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회피 행동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회피도 있다. 밤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길까”라며 지나간 일을 곱씹는 반추가 대표적이다. 답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생각만 맴돌 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중요한 결정을 미룬 채 서랍을 정리하거나 청소 같은 사소한 일에만 매달리기도 한다. 계획표를 계속 새로 만들면서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생길 때까지 시작하지 않는 것 역시 회피다.

환자는 술과 잠, 게임, 반추가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당장 괴로운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업무를 미루면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이 잠시 가벼워진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실패할 위험도, 무능력한 자신과 마주할 필요도 없다. 술을 마시거나 게임에 몰입하면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도 잠깐 사라진다. 이처럼 어떤 행동을 한 뒤 불안과 부담이 줄어들면서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을 ‘부정적 강화’라고 한다. 부정적 강화로 회피 행동이 반복될수록 우울증의 악순환은 깊어진다.

회피가 없애준 것은 고통이 아니다. 잠깐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준 것뿐이다. 열어보지 않은 이메일은 쌓이고 미뤄둔 업무는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약속을 취소할수록 외로움은 깊어진다. 하루 종일 누워 지내면 체력이 떨어져 외출은 더 힘들어진다. 술과 게임, 소셜미디어에 의존할수록 수면과 집중력은 나빠지고 현실을 감당할 힘은 약해진다.

행동 심리학자 찰스 퍼스터와 피터 르윈손은 회피 행동이 늘고 긍정적인 보상을 얻는 활동이 줄어들면서 우울증이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행동 뒤에 따르는 결과가 다음 행동에 영향을 준다. 어떤 행동 뒤에 즐거움이나 성취감이 따라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것을 ‘긍정적 강화’라고 한다. 회피가 반복되면 삶의 반경이 좁아지면서,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과 사람들과의 친밀감, 운동한 뒤의 개운함을 경험할 기회도 줄어든다. 보상이 줄어들면 의욕은 더 떨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즐거움과 성취감을 경험할 기회도 다시 줄어든다. 긍정적 강화가 줄면 우울증을 지속시키는 악순환이 생긴다.

회피 여부는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행동이 맡은 역할로 판단한다. 지친 몸을 회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정한 시간 쉬는 것은 휴식이지만, 해야 할 일과 걱정을 피하려고 온종일 잠을 자는 것은 회피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정해진 시간 동안 게임을 하고 멈추는 것은 여가 활동이지만,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밤을 새우며 게임에 매달리는 것은 회피다. 혼자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지만, 상처받을까 두려워 연락을 모두 끊고 방 안에만 머무는 것은 회피다.

“나는 지금 무엇을 피하려고 이 행동을 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행동을 하고 나서 내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당장은 편해졌지만,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점검해 보는 것도 좋다.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면 휴식과 회피, 즐거움과 도피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행동한 뒤 삶으로 다시 돌아갈 힘이 생기는지, 아니면 현실과 더 멀어지는지가 판단 기준이다.

회피 행동인지 확인하려면 행동의 전후를 시간 순서대로 살펴본다. 행동하기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린다. 행동 후에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몇 시간이나 하루가 지난 뒤에는 어떤 결과가 남았는지 확인한다. 업무 이메일을 읽고 불안해져 창을 닫은 뒤 짧은 동영상만 한 시간 동안 보았다고 해보자. 당장은 마음이 편해지지만 답장하지 않은 이메일 때문에 다음 날에는 불안이 더 커진다. 즉시 찾아오는 안도감 뒤에 더 큰 부담이 남았다면 그 행동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

회피 행동을 발견했다고 한꺼번에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조차 큰 과제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살아야지”라는 거창한 결심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만 남긴다. 회피 행동 하나를 삶과 다시 연결되는 작은 행동으로 바꿔보자.

침대에서 나오기 어렵다면 몸을 일으켜 커튼만 열어본다. 답장을 미뤘다면 길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짧은 문장 하나만 보낸다. 외출이 두렵다면 운동화를 신고 집 앞을 5분만 걷는다. 반추에 빠졌다면 머릿속에서 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빨래를 개거나 설거지하며 손을 움직인다. 작은 행동 하나가 회피의 악순환을 끊고 현실로 되돌아오는 출발점이다.

가족의 역할도 중요하다. 환자를 억지로 침대에서 끌어내거나 “왜 그것도 못 하니?”라고 다그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만 키운다. “혼자 하기 어려우면 내가 같이 걸어줄게”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함께 해보자”고 말하자. 그렇다고 모든 일을 대신 해줘서는 안 된다. 환자가 자기 힘으로 행동하고 그 결과로 얻는 작은 성취감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은 남겨두고 결과보다 시도를 알아봐 주자. 커튼을 연 것, 한 끼를 챙겨 먹은 것, 현관 밖으로 한 걸음 나간 것을 인정해 주면 된다. 작은 시도가 반복될수록 환자는 “나도 움직일 수 있고, 내가 움직이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