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학력의 <신의 손>이 만들어 낸 기념비적 심장수술

김원곤 교수의 영화와 흉부외과

서울대병원 흉부외과/김원곤 교수

영화 <Something the Lord Made>는 조셉 사젠트 감독이 2004년 만든 것으로 미국의  케이블 TV 프로그램 공급회사인 HBO가 제작한 오리지널 작품이다. 같은 해 에미(Emmy)상의 9개 부문에서 후보로 올랐으며 그중 3개 부분에서 수상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영화관에서는 개봉되지 않았지만 2010년 9월 11일 KBS 명화극장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제목은 <신의 손>이었다.

이 영화는 1930~40년대 흑백 인종차별이 여전히 팽배하고 있었던 시절의 미국사회에서 고등학교 졸업 학력만 가진 한 흑인 청년이 세계 심장수술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긴데 대한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1989년 잡지 여기자인 캐티(Katie McCabe)가 '워싱토니안(Washingtonian)'이란 잡지에 쓴 기사 <Like Something the Lord Made>에 바탕을 두었다. 당시 기사 제목은 유명한 심장외과 의사였던 알프레드 블레이락이 영화의 주인공 비비안 토마스의 외과적 손재주를 일컬어 <마치 신이 만든 것과 같다>라고 찬탄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영화제목 역시 이 표현을 딴 것이다. 

1930년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의 한 실험실에 당시 20세밖에 되지 않은 한 흑인소년이 들어 왔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 소년의 이름은 비비안 토마스(Vivien Theodore Thomas; 1910-1985, 모스 데프 분)로 원래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실험실로 오기 전 목수로 일하면서 대학에 가기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일에서마저 해고된데다 마침 발생한 증시 대공황으로 저축해 둔 대부분의 돈을 날리고 말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비비안은 새로운 직업을 찾아 나섰고, 그때 친구로부터 밴더빌트 대학에서 실험실 관리를 맡을 잡역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실험실 책임자는 당시 외상성 쇼크(traumatic shock)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던 30대 초반의  젊은 외과의사 닥터 알프레드 블레이락(Alfred Blalock; 1899-1964, 알란 릭맨 분)이었다. 비비안이 처음 맡은 일은 실험실과 실험견 우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비안은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물 마취법을 배우고 실험견을 능숙하게 다루었으며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수기도 터득하였다. 닥터 블레이락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생각하였던 이 청년에게서 총명한 머리와 함께 비범한 외과적 재능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비비안에 대한 닥터 블레이락의 의존도가 점차 높아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실험 도중 비비안이 사소한 절차상의 실수를 저질렀다. 성질이 급한 닥터 블레이락은 비비안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과도한 질책을 듣고 난 비비안은 차라리 그만두겠다며 차분한 어투로 “나는 그런 식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순간 닥터 블레이락은 잘못을 깨닫고  비비안에게 사과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다시 일을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비비안과 닥터 블레이락은 힘을 합쳐 더욱 연구에 매진하였다. 

당시 실험실 바깥의 미국은 여전히 대공황의 검은 먹구름이 덮여있었다. 비비안으로서는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대학에 갈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결정하였다. 그는 장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의학 관련 책을 읽고 실험을 하면서 하루 16시간을 묵묵히 지냈다.

당시는 백인과 흑인의 신분 차이가 뚜렷할 때여서 닥터 블레이락과 비비안 두 사람 사이에서도 어떤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러나 실험실 내에서 일에 관한한 그들은 완벽한 하나의 팀이었다. 의학자로서의 블레이락은 간단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의문을 계속 제기하였고, 토마스는 그 뛰어난 손재주를 이용하여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가장 간단한 길을 찾아내었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다른 연구소들에서도 외상성 쇽의 기전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닥터 블레이락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룰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그의 연구실에는 비비안이 있는 반면 다른 연구소에서는 그렇지 못한 차이였다. 닥터 블레이락과 비비안의 외상성 쇽에 대한 연구결과는 훗날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쇽의 치료 방법으로 혈액과 혈장을 일차적으로 수혈하게 하는 데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닥터 블레이락의 연구 성적에 대한 명성이 미국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마침내 그는 1941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볼티모어에 있는 그의 모교인 유명한 존스 홉킨스 병원의 외과 과장 자리를 제안 받게 된다. 그는 당연히 비비안을 그의 팀에 포함시킬 것을 계약 조건으로 내 걸었다. 닥터 블레이락은 비비안을 연구실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 일은 존스 홉킨스병원의 스텝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당시 볼티모어는 내슈빌에 비해 흑백차별이 더 심해 병원에서도 유색인종은 뒷문으로 출입하고 화장실도 백인과 따로 써야했던 시대였다. 연구실 가운을 입은 흑인을 보는 것도 초유의 일인데 의사도 아닌 사람에게 실험실을 맡긴다는 것은 당시 존스 홉킨스병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의 비비안의 뛰어난 능력은 그러한 놀라움을 또 다른 놀라움으로 바뀌게 하였다.

그러나 비비안 스스로는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였다. 부인 클라라 토마스(가브리엘 유니언 분)는 계속 내슈빌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고, 그 자신도 자신의 업무 능력과 관계없이 병원 규정상 일반 잡역부와 똑 같은 대우를 받는데 대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만 두겠다는 비비안을 닥터 블레이락은 병원 집행부와 상의 끝에 임금을 올려 주기로 하고 그의 집까지 찾아가 사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1943년 어느 날 존스 홉킨스 병원의 소아심장 전문 여의사인 헬렌 타우식(Helen Taussig; 1898~1986, 메리 스튜어트 메스터슨 분)이 팔로사징(Tetralogt of Fallot)이라는 선천성 심장기형 환자에서의 외과적 치료법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닥터 블레이락에게 이야기하였다.

 당시 존스 홉킨스병원의 소아과 의사들에게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는 심한 청색증을 보이면서 대책 없이 죽어가는 어린 팔로사징 환자들이었다. 팔로사징은 이 병을 처음 기술한 프랑스 의사 팔로(Etienne-Louis Arthur Fallot; 1850~1911)의 이름을 딴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청색증 심장병 중에서는 가장 흔한 질환이다. 이 병은 사징이란 이름대로 ① 심실중격 결손, ② 폐동맥 협착, ③ 우심실비대, ④ 대동맥 우측전위의 4가지 특징을 보인다. 

닥터 타우식은 이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팔로사징에서는 폐동맥 혈류의 감소가 청색증을 비롯한 각종 증상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녀는 추가 연구를 통해 <만일 팔로사징 환자들의 좁아진 폐동맥에 외과적으로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주어 보다 많은 혈액을 폐로 보내주게 되면 청색증이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닥터 타우식에게 이제 남은 것은 그녀의 이론을 실제 증명하여 줄 외과 의사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닥터 블레이락이 존스 홉킨스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과거 밴더빌트 대학에서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비슷한 실험을 한 경험이 있었던 닥터 블레이락 역시 이 이야기를 듣고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닥터 블레이락은 곧 비비안과 함께 실험을 해나갔다. 실험의 기본 계획은 실험견에서 폐동맥을 좁혀 인위적으로 청색증을 만든 뒤 폐동맥에 새로운 혈류 통로(단락, shunt)를 만들어 주어 과연 청색증이 사라지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혈류 공급원으로는 주위의 쇄골하동맥(subclavian artery)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실제 실험과정은 대부분 비비안이. 맡아서 시행하였다. 실험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실험견에서 인위적으로 청색증을 만드는 것이었으나 비비안의 노력으로 결국 성공하였다.  그 다음 단계로 단락을 만들어 주는 것은 비비안의 능력으로는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닥터 블레이락은 비비안의 실험 결과를 보고 닥터 타우식의 아이디어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과연 상태가 좋지 않은 팔로사징 환자들이 마취와 수술을 견뎌낼 수 있을까? 수술 자체로 인해 위험한 합병증이 초래되지는 않을까? 라는 등의 의문들이 끝없이 제기되었다. 주위에서도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에서부터 좀 더 충분한 실험결과를 확보한 뒤 수술을 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에까지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어쨌든 당시는 심장수술에 대한 공포와 금기 분위기가 여전히 의료계를 강하게 압박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닥터 블레이락의 입장에서는 병상에서 속절없이 죽어가는 어린 환자들을 감안할 때 마냥 시간을 지체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닥터 블레이락은 여러 가지 문제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환자에서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944년 11월 29일 아이린 색슨이라는 15개월 된 팔로사징 여아에서 첫 수술이 시행되었다.

닥터 블레이락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없이 비비안을 불러 그의 어깨너머로 수술을 지켜보게 하였다. 닥터 블레이락이 폐동맥과 쇄골하동맥을 박리한 후 비비안에게 <절제한 후 쇄골하동맥이 폐동맥까지 갈 수 있을까?> 라고 물었을 때 토마스는 <충분합니다.> 라고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비비안은 또 봉합 방향이 틀릴 때는 조용히 이를 지적해 주기도 하였다. 닥터 타우식도 환자의 머리맡에 있었다.

환아는 곧 청색증 대신 핑크빛 뺨과 붉은 입술을 보였다. 이날 이후 수많은 청색증 심장 환자의 생명을 구한 유명한 블레이락-타우식 단락수술(Blalock-Taussig shunt, B-T Shunt)의 탄생 순간이었다. 이후 존스 홉킨스 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세계 의료계의 관심 속에 수술이 계속되는 가운데 닥터 블레이락은 항상 비비안을 그의 어깨 뒤에서 지켜보게 하였다. 그의 뒤에는 비비안 이외에는 그 누구도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술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비안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수술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정작 수술 후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모든 공과 명예는 닥터 블레이락과 타우식 그리고 수술 조수 등 의사들에게 돌아갔을 뿐 그는 여전히 별 볼일 없는 실험실의 유색인종 관리자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비비안은 사표를 내고 실험실을 떠난다. 그리고 잠시 제약회사 외판원으로 일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닥터 블레이락의 실험실로 돌아오고 만다. 닥터 블레이락과 비비안은 그렇게 같이 20년간을 일했다. 닥터 블레이락은 실험실일 뿐만 아니라 그의 레지던트의 수기 트레이닝까지도 비비안에게 맡겼다.

1964년 닥터 블레이락은 요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후 1971년 비비안 토마스는 일찍이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영예스러운 순간을 맞이한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 걸려있는 닥터 블레이락의 사진 옆에 많은 의료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사진이 걸리게 된 것이다.

또 얼마 후에는 병원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의과대학의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의학계의 위대한 숨은 영웅 비비안 토마스는 1985년 75세를 일기로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 본 칼럼의 내용은 헬스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원곤 교수의 영화와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의 영화와 흉부외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심장연구소장 역임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정맥류 클리닉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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