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 인터뷰>
“쉬지 않고 달린 인생…
그림으로 휴식을 얻다”
VOL.435 (화·수·목·금 발행)
2024-06-04

일평생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살다가 암을 진단받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환자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간호사, 딸들의 버팀목, 든든한 며느리…. 묵묵히 가정과 사회에서 부여한 여러 역할을 지키다 두 번의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결말이 겨우 이것뿐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픈 와중에 본인의 건강보다는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장암과 갑상선암을 극복한 김미정씨./사진=신지호 기자


그러던 중 마음이 행복한 게 가장 행복한 것임을 깨닫고 현재 본인의 삶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서, 베이킹, 원예 등 다양한 영역에 도전했고 지금은 여행과 드로잉을 접목한 새로운 취미생활에 푹 빠져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발이 닿는 대로 세계 각국을 다니며 다양한 장소를 그림 속에 담습니다.


2018년 3월, 간헐적으로 복통을 느껴 진통제로 통증을 달래던 김미정(58·서울시 도봉구)씨는 어느 날 극심한 복통과 어지러움에 동네병원에 내원했습니다. 맹장염이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을 것을 권고해 피검사와 엑스레이 등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맹장염이 아니라 신장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조직이 있던 겁니다. 컴퓨터단층촬영(CT) 결과 신장암이었습니다. 


5월에 로봇 수술로 신장 부분 절제술을 받았습니다. 신장 부분 절제술은 종양이 생긴 부위만 절제해 신장 기능을 보존하면서 신장암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표준 치료법입니다. 수술이 끝나고 당시 근무하던 암 요양병원에 4주 정도 입원해 회복에 힘썼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에는 곧바로 직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일하며 4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2022년 여름, 김미정씨는 또 한 번 암을 진단 받습니다. 이번에는 갑상선암이었습니다. 추적 관찰하며 상태를 지켜보던 도중, 9개월 뒤인 2023년 1월에 종양 크기가 커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퇴원하던 길에 갑자기 목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동맥 파열로 응급 상황이 벌어져 그때 이후로 며칠간의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중환자실에 누워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종양이 경동맥에 인접해 있어 수술 후 경동맥이 많이 약해진 상태인데 몸을 움직이면서 조금씩 자극이 가해져 경동맥이 터진 상황이었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곧바로 응급 수술을 시행해 다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암 수술을 받고 한 달만 쉬고 다시 직장에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중환자실에서 퇴원하고 난 뒤에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직장생활을 한 뒤 처음으로 장기간 일을 쉬었습니다.


집에만 있자니 힘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 탓에 반려견을 한 시간씩 산책시키며 매일 만 보를 걸었습니다. 틈틈이 여행도 다녔습니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여행 드로잉’ 강좌를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국내외 곳곳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색깔을 사용해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그리고 표현하다 보니 근심이나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김미정씨>


신장암과 갑상선암을 극복한 김미정씨./사진=신지호 기자


-어떻게 지내세요?

“여행하며 그림 그리며 재미나게 살고 있습니다. 드로잉 강좌를 들은 이후로 스페인·베트남·일본을 다녀왔고 국내 10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풍경을 그려 모으는 중입니다. 서울에서 매주 ‘어반 스케치 모임’에 참여하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림 그리고 배우는 시간도 보내고 있어요. 정식 출간은 안 했지만 최근에는 동화책을 엮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가 유방암으로 투병 중인데, 이 친구에게 ‘건강해져서 오랫동안 함께 하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책으로 전달하고 싶어 만들었습니다.”


-책을 낸 적이 있으시죠?

“네. 저는 대학 졸업을 한 1987년도부터 암 요양병원에서 암 전문 상담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암에 걸린 분들을 오랫동안 돌봐왔고, 암에 걸려도 봤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보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책을 냈습니다. 신장암 치료 후 2019년도 10월에 신장암 투병기를 담은 ‘아ㅁ도 나를 말릴 수 없다’를 출간했습니다. 암 환자들의 식사 요령이나 심리안정에 효과적이었던 활동을 모아서 정리한 책입니다.”


김미정씨가 출간한 책 '아ㅁ도 나를 말릴 수 없다'(왼쪽)와 김미정씨가 그린 나고야성(오른쪽)./사진=신지호 기자


-암을 두 번이나 겪으셨어요. 마음이 어떠셨나요?

“신장암을 진단 받았을 때에는 크게 놀라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빠르게 치료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금세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상선암은 신장암 때와 달리 무섭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갑상선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계신데 그 생각이 자꾸 나더라고요. 신장암을 진단받았을 때는 부모님이나 작은딸한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료 받았는데 갑상선암 결과 들으러 갈 때는 큰딸과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결과를 확인하고 나니 너무 무서워서 딸 앞인데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는데 세상이 너무하다’는 생각에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상선암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딱 눈을 떴을 때 창밖에 눈이 내리는 게 보였습니다.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왠지 모르게 모든 걸 용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삶에 욕심 부리지 않고 현재를 즐기고 감사해하며 사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게 됐습니다.”


-투병 과정에서 힘든 건 없었나요?

“체력이 예전만 못한 게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갑상선이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다 보니 전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쉽게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라서 밖으로 나가야 에너지를 얻는 편인데 하루만 바깥 생활을 해도 다음날에는 무조건 쉬어야 할 정도로 체력이 바닥이었습니다. 갑상선 수술로 인해 침을 삼킬 때 이물감이 느껴지고 입이 마르는 등 약간의 불편함도 겪었습니다. 그래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건 아니고, 암 투병 때보다 오히려 갱년기 때가 더 힘들었다고 여기는 것 보면 암은 나름대로 의연하게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취미생활로 암에 대한 고통을 잊으셨다고요?

“제가 26살 때 병원에서 우수 사원으로 뽑혀서 일본 도쿄로 처음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운 좋게 매년 태국, 서유럽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해서 해외뿐 아니라 국내도 다양한 곳을 다녔습니다. 아무래도 집이나 병원에 있을 때는 제가 해야 할 몫과 책임이 있는데 여행을 가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서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림도 비슷한 맥락에서 빠져들었습니다. ‘무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장비로 틀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저랑 잘 맞았습니다. 매주 한 번씩 아마추어들끼리 모여서 그림을 그리는 모임에 참여 중입니다.”


-‘여행 드로잉’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어디든 떠날 때마다 배낭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그림 도구를 간단하게 챙깁니다. 조그만 20색 팔레트, 펜 하나, 스케치북 한 권이 준비물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챙겨간 스케치북 한 권을 여행을 한 번 갈 때마다 꽉 채워 돌아옵니다. 유적지나 풍경 앞에 서서 짬짬이 시간을 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이나 내부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하기도 하는데요. 일본에서 갔던 한 식당의 주방장이 제가 그린 그림을 사진 찍더니 홈페이지에 게재하기도 했고, 스페인에서 만난 가이드 한 분은 그림이 빼곡한 스케치북을 본인한테 팔라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보통 여행을 가면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들 찍으시는데, 저는 사진 대신 그림으로 추억을 남깁니다. 그 순간에 느낀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요즘은 태블릿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행 동화책을 제대로 한 권 만들어보려고 계획 중입니다.”


-지금 암과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한 마디.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간호사 시절 대화를 나눈 수많은 암 환자들을 떠올려보면 ‘어떻게든 살아야한다’며 이것저것 암에 좋다는 검증되지 않은 식품을 사 먹고, 산에 들어가서 자연 치유를 하는 등 모든 시도를 다 했던 분들은 오히려 예후가 좋지 않았습니다. 비과학적인 치료를 무조건 피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암의 표준 치료인 수술·항암·방사선을 제때 잘 받고 체력과 몸 상태가 허락하는 때에 다른 치료를 시도해보는 등 균형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잘 받아들이세요. ‘왜 내가 암에 걸렸지’라고 원망만 하면 몸이 나를 원망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부르게 됩니다. 암이 몸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암을 잘 달래서 잠재우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암 환자라는 생각에만 너무 몰입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암만을 생각하지 않게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줄 무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저에게는 그림이 그렇습니다.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 활동에 임할 때만큼은 더 열심히 웃으세요!”


/최지우 기자 cjw@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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