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삶의 따뜻한 순간들,
그 순간을 잇는 감정
VOL.394 (화·수·목·금 발행)
2024-03-20

몸이 아픈 분들에게 그림을 보게 하거나 그릴 수 있도록 하는 미술치료는 환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표출하도록 돕기도 하고,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에 대한 인식을 드러나게 해 의료진과 가족에게 다리는 놓아주는 역할도 합니다.


김태은 교수가 그린 그림.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환자분들은 자신이 영위해온 직장생활, 취미생활, 사회적 관계가 모두 멈춰 단절되고 고립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나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끝난다는 좌절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던 60대 후반의 환자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 분은 가난한 환경 탓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환자분은 자신의 상태를 잘 표현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에 집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를 만날 때에는 시선을 창밖에 둔 채 “빨리 눈감고 싶습니다.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라며 한숨을 내뱉듯 말씀하시는 게 전부였습니다. 환자의 옆을 지키는 보호자분도 같이 한숨을 내쉴 뿐 어떤 대화도 눈 맞춤도 없었습니다. 미련이 없다는 환자분의 공허한 내뱉음과 그런 환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보호자의 주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환자분이 유일하게 흐릿한 미소를 지으시는 순간이 있었는데요. 보호자가 쉬러 간 사이 홀로 휴대폰을 꺼내서 손녀딸 사진을 볼 때였습니다. 첫째 딸이 살림밑천을 장만하겠다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가,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곳에서 지금은 아주 큰 집에서 여유롭게 잘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전에 딸이 출산을 했다 합니다. 엄마가 된 딸도, 딸에게서 태어난 소중한 생명인 손녀도 아직 안아보지 못했다며 아쉬운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행기 값도 비싸고, 딸네 가족이 한국에 와서 지낼 곳도 변변치 않고, 이렇게 아픈 모습도 보여주기 싫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환자분의 마음이 통한 걸까요. 호주에 사는 딸네 가족이 한국행을 계획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3년 만에 한국을 찾은 딸은 병원에서 만난 아버지의 모습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임신한 딸에게, 출산을 앞둔 딸에게, 출산하고 조리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차마 암이라는 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좀 몸이 안 좋다’ 정도로만 알고 있던 딸은 아버지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까맣게 변한 얼굴을 쓰다듬고 자신의 볼을 부비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빠 아프지 마. 우리 아기한테 오래오래 좋은 할아버지가 돼줘야지.” 그렇게 딸과 아버지는 한참 눈물을 흘렸습니다.


환자분은 그렇게 애타게 사진으로만 보던 손녀딸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딸과 손녀딸은 환자분의 몸과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어줬습니다.


다음날, 환자분은 처음으로 저에게 그림을 부탁하셨습니다. 손녀딸 발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는데요. 그걸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환자분은 ‘그 발이 얼마나 보드라웠는지, 손녀가 자신을 처음 봤는데도 어쩜 그리 잘 따르는지, 또 얼마나 예쁜지’ 끝없이 어제의 만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딸이 처음 태어났던 때로 흘러갔습니다.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돈 벌러 다니느라 가족을 성실히 보살피지 못했는데, 첫딸이 태어나고 딸이 자신의 손가락을 꼭 잡던 그 순간 ‘이 아이를 위해 삶을 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었다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환자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딸을 안고 잘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셨던 것처럼, 손녀딸을 보셨으니 또 다시 잘 살아내겠다는 의지를 가져보세요.”


환자분은 제게 처음으로 함박웃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노년기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를 자신의 존재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중·노년기 이후에는 자기를 넘어서 타인과의 공동체를 중요시하고 사고를 확장해서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자기와 연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미술은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나와 알 수 없는 미래의 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이 세상과의 좋은 연결감을 만들어낸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좋은 수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따뜻한 기억이 남아있나요? 손녀딸의 보드라운 발을 잡았을 때의 그 감촉일 수도, 아이가 내 손을 처음 꼭 쥐었을 때의 그 느낌일 수도 있겠지요. 그 기억을 꺼내보세요. 그리고 그림으로, 말로, 글로 표현해보세요. 그 전에는 못 느끼던 희망과 의지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그려질 것이고요.


/김태은 드림(일산차병원 암 통합 힐링센터 교수)
암에 걸리고도 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나아가, 암을 현명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아미랑과 함께하면 마음의 평안은 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