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엄마의 요리책
VOL.364 (화·수·목·금 발행)
2024-01-24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의료진과 환자,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또 완화의료센터 내 다학제 팀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임종기 환자의 신체적·심리적 통증 관리에 큰 도움이 됩니다. 

김태은 교수가 그린 그림

다학제 회의에서 의료진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한 환자분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셨고, 가족들도 답답해한다 했습니다. 음악치료나 미술치료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회의 이후 저는 그 환자분을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여전히 미술치료 받는 것을 거부하셨지만 미소 지으시면서 제게 “다른 분들이 미술치료하는 것 옆에서 봤습니다. 그분께 확실히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표현을 안 하는 분이 아니라,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환자의 두 딸은 혹시 의사표현을 잘 안 하는 자신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해 매우 예민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픈 곳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해라’라며 채근하곤 했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환자분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지요.


하루는 휴게실에서 그 환자분을 만났습니다. 인사드리며 옆으로 다가가니 “우리 딸들이 말을 저렇게 해도 참 착한 애들이에요”라고 하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입을 여신 게 반가워 저는 그 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딸들이 똑똑해서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공부를 잘했고, 사회생활도 잘해서 회사에서는 높은 직급이라고 자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은 주로 ‘딸들은 자신과 달라서’ 멋지고 똑똑하고 멋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딸들과 달리 자신은 얼마나 무능하고 답답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밥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살림하는 것 말고는 해본 것도 없다.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 노래도 잘 모르고 난 그런 사람이다.”


어느새 휴게실로 엄마를 찾아 온 두 딸이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자분의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따님들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어떤 분이시냐고요. 똑똑하고 씩씩한 따님들은 엄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엄마가 계셔서 우리 집에 따뜻한 온기가 돌았어요.”

“엄마의 손길이 닿은 잘 다려진 교복 블라우스, 새하얀 실내화, 물기 없이 뽀송하던 욕실, 항상 행주 삶는 냄새가 나던 깔끔한 주방이 제 학창 시절과 함께 늘 떠올라요.”

“엄마는 정말 완벽한 엄마셨어요.”


그동안 굳어만 있던 딸들의 표정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를 추억하며 환자분도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시절, 세 모녀가 시장에 다녀오면 식탁에 둘러 앉아 멸치를 다듬고, 콩나물도 다듬었다던 추억이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볍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흔하지만 따뜻했던 요리 재료들과 그때 나누던 대화들을 들춰보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환자분이 약간은 쑥스러운 듯 말하셨습니다. “분홍색 고무장갑도 좀 그려달라”고요. 딸들이 항상 고무장갑을 끼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딸들의 말을 안 들은 것이 못내 미안하고 마음에 걸린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따님들은 “드디어 엄마가 우리말을 듣네”하며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야”라는 말을 끝으로 저희는 그날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환자분은 이후에 몸을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는 순간까지 두 딸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목소리로 녹음해 남기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들으며 그 내용을 그림과 글씨로 잘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환자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요리책을 두 딸에게 유품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임종기에 들어서면 많은 환자분들이 삶을 정리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그것 아시나요? 정리하는 시기에도 우리는 삶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밥밖에 해준 게 없다던 환자분은 자신이 얼마나 큰 품을 가진 ‘어머니’였는지, 그 품에서 얼마나 멋진 자녀들이 자라났는지 깨닫고 벅찬 감동을 느끼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이 그렇게 멋진 요리책의 저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기적’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 시간 속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함을 갖고 하루하루를 적극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기적을 경험하실 겁니다. 여러분만의 ‘요리책’은 무엇인가요?



/김태은 드림(일산차병원 암 통합 힐링센터 교수)
암에 걸리고도 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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