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혈과 어지러움

함께 가는 길

보라매병원/정우영 교수

한 할머니가 병원을 찾아 왔다.
의사 : 할머니, 어디 불편해서 오셨어요?
할머니 : 제가 빈혈이 있어서요.
의사 : 빈혈이요? 혈색도 좋아 보이시는데..

눈의 결막을 관찰해 보니 전혀 창백하지 않다.

의사 : 여기는 심장, 혈관병 보는 과인데 빈혈이 있어서 오셨어요? 빈혈이 있어서 어떠신데요?
할머니 : 갑자기 어지럽고 쓰러질 거 같고 정신이 나가려고 해요.
의사 : 아하 ! 현기증이 나신다는 말이죠.

대한민국 사람의 대다수가 어지러운 것, 아찔한 것, 현기증을 빈혈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빈혈은 한자로 貧血(부족할 빈, 피 혈)로서, 피가 모자란 상태에 있는 병의 이름이다. 헌혈할 때 몸에서 흘러 나오는 뻘건 혈액량이 몸에 부족한 병이고, 철분결핍성 빈혈, 비타민부족성 빈혈, 백혈병에 의한 빈혈, 재생불량성 빈혈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피가 많이 부족하다 보면 혈압이 정상, 심지어 높은 상황이라도 핏속의 산소를 받아 쓰는 뇌는 산소공급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이게 어지러움, 현기증으로 나타난다. 즉, 어지러움은 빈혈이라는 병의 증상 중 하나이고 어지간히 심한 빈혈 아니고서는 사실, 현기증까지 생기지는 않고, 기운 없고 무기력하고 숨이 찬게 보다 흔한 증상이다. 마치 혈압이 많이 낮을 때 서 있으면 나타나는 현기증과 같은 이치이다. (혈압이 낮으면 피 자체가 뇌로 적게 오니까 뇌는 산소부족을 느낀다.)

이렇게, 빈혈의 한 증상에 불과한 어지러움, 현기증을 빈혈이라고 바꿔 부르다 보니, 현기증을 일으키는 많은 상황과 병들이 빈혈로 둔갑하여 환자들 사이에 와전이 되고, 환자 사이에, 환자-의사 사이에 의사소통의 장애를 일으킨다. 사실은 맥박이 지나치게 느려져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었던 위의 할머니의 사례도 스스로는 물론, 가족들도 빈혈로만 알아 약국에서 한동안 빈혈약만 사서 먹었던 사례이다. 빈혈약이 위험할 수 있거나 부작용이 심각한 약제를 아니라 드셔서 손해 본 것은 크게 없지만 맥박이 느려 뇌로 피가 덜 가서 현기증을 느끼는 이 질환은 간혹 아예 실신하게 만들고 이 때 뇌를 다치면서 입원치료, 뇌수술 같이 고생을 한 차례 겪든지 심각한 후유증을 일평생 안고 살기도 한다.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현기증은 빈혈이나 위에서 말한 맥박이 느려지는 질병 이외에도 뇌혈류가 저하되는 여러 질병에서 나타난다. 뇌혈관이 좁아지는 병, 고혈압 약제의 부작용, 너무 철저히 조절되는 혈압, 맥박이 불규칙하거나 너무 빨리 뛰는 병에서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겪을 수 있고 그 각각마다 진단방법과 조치가 다르다. 그런데, 이걸 모두 빈혈이라고만 생각을 하니 환자들은 엉뚱한 진료과를 찾아 가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된다.

또, 반대의 경우들도 있다. 정작 잘 치료를 받아야 할 진짜 빈혈 환자는 어지럽지 않기 때문에, 그 진단을 쉽게 못 믿고 여러 병원, 의사들을 전전하게 된다. 어지간한 빈혈이 아닌 다음에야 피가 모자라서 현기증을 겪게 되지는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어지럽지 않을 수 있다.

빈혈은 빈혈이고 어지러움은 어지러움이니까 그냥 어지럽다고 편하게 표현하면 된다.

* 본 칼럼의 내용은 헬스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가는 길

외래와 입원 진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생각하고 느껴보아야 하는 일상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환자들이 모르는 질병의 숨은 면, 그래서 벌어지는 오해, 의사들의 말 못할 고충, 내가 모르는 다른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훈훈한 병원문화를 소망합니다.

보라매병원 내과
서울의대 내과 부교수
미국 미네소타 로체스터시 메이오클리닉 연구원 (2011~2012)
미국 뉴욕시 코넬 콜럼비아 병원 단기연수 (2002)
일본 기타큐슈시 고쿠라기념병원 단기연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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